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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만 골라 다닌 여행의 의미

by 딱지쓰 2026. 1. 5.

여행 일정을 짜면서 나는 일부러 날씨 예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가장 비가 많이 오는 날들을 골라 이동 날짜를 정했다. 맑은 날의 풍경은 이미 충분히 보아왔고, 햇빛 아래의 도시는 어디든 비슷하게 아름다웠다. 이번에는 달라지고 싶었다.
비 오는 날에만 걷는 여행, 그것이 이번 여행의 조건이었다.

 

비 오는 날만 골라 다닌 여행의 의미
비 오는 날만 골라 다닌 여행의 의미

비를 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달라진 여행


여행에서 비는 대개 실패로 취급된다. 계획은 흐트러지고, 사진은 망가지고,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 전제를 아예 버리기로 했다. 우산을 챙기되, 비를 피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비 오는 날의 도시는 처음부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리는 낮아지고, 색은 진해졌다.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고, 머무는 장소는 자연스럽게 실내로 한정되었다. 여행자는 줄어들고, 도시의 일상이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맑은 날에는 그냥 지나쳤을 거리들이 비 오는 날에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빗물이 고인 골목, 처마 아래에서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 유리창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 이 도시는 비를 통해 스스로의 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비가 만들어준 느린 속도와 깊어진 시선


비 오는 날에는 걷는 속도가 느려진다. 바닥을 조심해야 하고, 멀리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까운 곳으로 옮겨진다. 발밑, 벽면, 창가,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
나는 비 오는 날마다 카페에 오래 머물렀다.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은 깊어졌다. 여행에서 흔히 느끼는 조급함이 사라지고, 그저 그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는 감각만 남았다.
비는 도시를 미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젖은 신발, 축축한 옷, 예상보다 오래 걸리는 이동 시간.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나는 이 여행이 진짜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날씨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숨겨지는 감정들이, 비 덕분에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맑은 날보다 오래 남은 비의 기억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뒤, 나는 이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생각해봤다. 아마도 특정 장소의 풍경보다는, 비 냄새와 빗소리, 우산을 접던 손의 감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비 오는 날만 골라 다닌 여행은 화려하지 않았다. 사진으로 자랑할 장면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억들은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비는 장면을 지워버리는 대신, 감각을 더 또렷하게 남겼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여행의 의미는 언제나 ‘좋은 조건’에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 더 솔직한 나와 더 진짜 같은 도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또다시 맑은 날을 피할지도 모른다. 비를 기다리지는 않더라도, 비를 두려워하지는 않게 될 것 같다. 비 오는 날만 골라 다닌 이 여행은, 내 여행의 기준을 조금 바꿔놓았다. 여행은 보기 좋은 순간이 아니라, 머무른 감정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