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여행지에서 만난 ‘침묵의 순간’들

by 딱지쓰 2026. 1. 5.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늘 무언가를 기대한다. 새로운 풍경, 새로운 말, 새로운 설명들. 여행은 보통 소음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의 언어, 거리의 음악, 사진을 찍으며 나누는 감탄.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을 돌아보면,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의 순간들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설명도 필요 없었던 시간들. 그 조용함 속에서 여행은 비로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행지에서 만난 ‘침묵의 순간’들
여행지에서 만난 ‘침묵의 순간’들

말이 사라진 자리에 풍경이 남았다


여행 초반, 나는 늘 하던 대로 움직였다. 풍경을 보면 설명하고 싶어졌고, 감정을 느끼면 말로 붙잡고 싶었다. 혼자 여행 중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 문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어떤 곳이고’, ‘이 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침묵은 어색했고, 무언가는 기록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오후, 작은 언덕에 올라 잠시 앉아 있었을 때였다. 특별히 유명한 장소도 아니었고, 전망이 탁 트인 곳도 아니었다. 바람이 불었고, 구름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설명도, 해석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냥 보고 있었다.
그 침묵은 처음엔 불안했다.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깨달았다.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도 있다는 사실을. 말로 붙잡지 않아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그 풍경은 충분히 나에게 닿고 있었다. 침묵은 풍경을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경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혼자였기에 가능했던 조용한 시간들


여행지에서의 침묵은 혼자일 때 더 분명해진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자연스럽게 대화로 채워졌을 시간들. 하지만 혼자였기에, 굳이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해가 지는 시간을 바라볼 때. 그 모든 순간에 침묵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이른 아침의 거리였다. 상점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사람들도 드물었다. 발소리조차 크게 느껴질 만큼 조용한 시간.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여행자라기보다, 잠시 그 도시에 속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말이 없으니, 나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침묵은 나를 관찰하게 만들었다. 주변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평소에는 대화와 소음 속에 묻혀 있던 생각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굳이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은 생각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여행지에서의 침묵은 그것들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머물게 허락하는 시간이었다.

 

침묵이 여행을 오래 남게 하는 이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사진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분명 많은 장면을 보았는데, 기억에 남는 건 몇 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신 특정한 침묵의 순간들이 불쑥 떠올랐다. 말없이 걷던 골목, 혼자 앉아 있던 벤치, 아무 소리 없이 바라보던 저녁 하늘.
그 순간들은 설명하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도 애매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다. 침묵은 공유되기보다, 개인적으로 깊이 저장되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행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장소를 설명할 수 있는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말이 사라진 순간, 여행은 가장 솔직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때의 나는 관광객도, 기록자도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분명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침묵을 일부러 남겨두려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는 시간. 그 시간들이 모여, 여행은 더 오래, 더 깊게 나에게 남을 테니까.
여행지에서 만난 침묵의 순간들은 돌아와서도 여전히 조용히 나를 따라다닌다. 그 침묵 덕분에 나는 그 여행을 아직 끝내지 못했다. 어쩌면 좋은 여행은, 끝난 뒤에도 계속 침묵으로 남아 있는 여행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