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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

by 딱지쓰 2026. 1. 20.

불안이 가장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야 ‘나’가 남는다


여행 중 길을 잃는 순간은 언제나 비슷하게 시작된다. 지도 앱의 파란 점이 갑자기 멈추거나, 분명 맞다고 생각했던 골목이 점점 낯설어질 때. 처음에는 단순한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거야.”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풍경이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때서야 불안이 올라온다.
이 불안은 단순히 목적지에 늦을까 봐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언어도, 지리도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방향 감각을 잃었다는 사실이 사람을 급격히 작아지게 만든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판단했을 선택 앞에서 괜히 망설이게 되고, 발걸음은 빨라지거나 반대로 멈춰 선다.
흥미로운 건, 그 불안의 정점이 지나고 나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순간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아, 길을 잃었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더 이상 조급해할 이유가 사라진다. 계획은 이미 틀어졌고,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된다. 그때부터 주변 풍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낯선 간판,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소리,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훨씬 많은 거리. 길을 잃지 않았다면 절대 보지 않았을 장면들이다. 이 순간에 남는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안 이후에 오는 단순함이다.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지금 이 길을 어떻게 걸을 것인가뿐이다.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

계획이 사라진 자리에서 생겨나는 감각들


여행은 대부분 계획으로 시작된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볼지, 몇 시에 이동할지. 하지만 길을 잃는 순간, 이 모든 계획은 무력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감각들이 살아난다.
길을 찾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사람들의 이동 흐름을 유심히 본다. 지도 대신 표정과 몸짓을 읽게 되고, ‘이쪽이 맞을 것 같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직감에 의존하게 된다. 이때의 감정은 긴장과 호기심이 묘하게 섞여 있다.
길을 잃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하나는 완전히 혼자라는 자각이다. 동행이 있어도, 결국 방향을 선택하는 순간에는 각자가 혼자 판단해야 한다. 이 고립감은 외롭다기보다는 선명하다. 평소라면 자동으로 흘려보냈을 생각들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나는 왜 이렇게 서두르며 여행했을까?”
“이곳에 오기 전, 어떤 상태였지?”
“지금 이 순간을 정말로 느끼고 있나?”
길을 잃은 상태에서는 목적지가 사라지기 때문에, 과정만 남는다. 그래서 감각이 예민해진다. 커피 향이 유독 진하게 느껴지고, 발밑의 돌 질감이 또렷해진다.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확대된 현재다.

 

결국 기억에 남는 건, 도착이 아니라 방황의 순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사진을 정리할 때, 이상하게도 길을 잃었던 순간들이 오래 남는다.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했을 때보다, 헤매던 골목에서 느꼈던 공기와 감정이 더 생생하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분명하다.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가장 솔직한 상태로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잘 즐기고 있는지’, ‘알차게 보고 있는지’를 평가하지 않는다. SNS에 올릴 사진도, 남에게 설명할 일정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이 집중은 여행을 소비가 아니라 경험으로 바꾼다.
길을 잃은 뒤 우연히 만난 작은 식당, 아무 계획 없이 들어간 공원, 길을 알려주던 낯선 사람의 손짓. 이런 장면들은 계획표 어디에도 없었지만, 여행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그 여행이 ‘다녀온 곳’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으로 기억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일부러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여행의 가장 깊은 감정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정리된 지도 위에서는 불안도, 즉흥도, 예상 밖의 감정도 생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은, 단순히 당황이나 초조함이 아니다.
그것은 계획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만나는 나 자신의 상태다.
돌아오는 길에 그 순간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길을 잃었기 때문에 보게 된 것들, 느끼게 된 것들, 그리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통제.
그래서 다음 여행에서도 우리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 길을 잃어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