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이상한 결심을 했다.
“내일은 아무 사진도 찍지 말자.”
기념사진도, 풍경도, 음식도, 심지어 숙소 창밖의 하늘조차도. 여행을 기록하지 않겠다는 이 선택은, 여행을 더 깊이 남기기 위한 나만의 실험처럼 느껴졌다.

카메라를 내려놓자, 시선이 올라왔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평소라면 가장 먼저 카메라 앱을 켰을 시간이었다. 빛의 각도, 구름의 모양, 거리의 색감을 계산하며 무의식적으로 화면 속 프레임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휴대폰은 가방 깊숙이 넣어두고, 꺼내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신기하게도, 카메라를 들지 않자 풍경이 달라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사진을 찍을 때의 나는 늘 바빴다. 더 예쁜 구도, 더 좋은 빛, 더 ‘여행스러운’ 장면을 찾느라 현재의 장면을 빠르게 소비했다. 하지만 사진을 찍지 않기로 한 오늘, 나는 멈춰 서는 횟수가 늘어났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고, 고개를 들고 주변을 오래 바라보게 됐다.
거리의 벽은 생각보다 거칠었고, 창문에 반사된 햇빛은 눈부실 정도로 강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이전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순간을 온전히 나에게 맡겨준 느낌이었다.
기록하지 않아도 남는 것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판조차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이건 찍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여행지의 음식은 늘 기록의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규칙은 단순했다. 어떤 장면도 저장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냄새를 맡았고, 천천히 씹었고, 식당 안의 소음을 들었다.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 옆 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웃음, 주방에서 들리는 기름 소리까지.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정보들이 감각을 채워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록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날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남았다. 머릿속에는 이미지가 아닌 감정의 조각들이 쌓였다. 편안함, 약간의 외로움, 이유 없는 만족감. 사진 파일로 남지 않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분명히 저장되고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니, 이 여행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좋아요’를 받을 장면도, 설명을 붙일 순간도 없었다. 그저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기억하면 되는 하루였다.
기억은 저장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사실
해가 기울 무렵, 강가에 앉아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바라봤다. 보통이라면 이 장면을 여러 각도로 찍고, 그중 가장 괜찮은 사진을 고르느라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그저 앉아 있었고,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을 느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저장이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고.
사진은 순간을 붙잡지만, 동시에 순간을 대신해준다. “이건 나중에 봐도 되니까”라는 핑계로 지금을 덜 느끼게 만든다. 오늘 하루, 나는 그 대체 수단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래서인지 여행이 더 날것처럼 다가왔다. 불완전했고, 흐릿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진짜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오늘 하루를 떠올려봤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또렷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생생했다. 장면이 아니라 감정이 중심이 된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구체적인 풍경은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 하루는 사진첩이 아니라 나의 감각 안에 남아 있으니까.
다음 여행에서도 이 실험을 다시 해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진을 찍지 않았던 이 하루가, 내 여행 중 가장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