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길 위에서 보낸 시간만 모아 쓴 글
여행을 떠올리면 우리는 도착한 장소부터 생각한다. 유명한 풍경, 맛집, 사진으로 남길 장면들. 하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뒤,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은 종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들이다. 이 글은 여행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시간’만을 모아 쓴 기록이다.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들
여행 중 길 위에 있는 시간은 묘하게 안전하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끝난 것도 아니다. 버스 안, 기차 창가, 공항 대기석, 낯선 도시의 인도 위. 그 시간에는 성과도, 평가도 없다. 그냥 이동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감정이 유예된다.
이 시간에 우리는 잘못 도착할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망할 필요도 없다. 아직 무엇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 위의 시간은 기대와 결과 사이에 끼어 있는 완충지대 같다. 그래서 생각보다 편안하다.
창밖으로 풍경이 흘러가고, 표지판의 언어가 바뀌고, 햇빛의 각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 변화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리는 그저 앉아 있거나 걷고 있을 뿐인데, 세상이 알아서 바뀌어준다. 여행 중 가장 수동적인 시간, 그래서 가장 마음이 느슨해지는 시간이다.
길 위에서는 생각이 목적을 잃는다
길 위에서의 생각은 목적지가 없다. 도착해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도, 금세 전혀 다른 기억으로 튄다. 오래된 장면, 말하지 못한 문장, 갑자기 떠오른 얼굴. 이동 중의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흘러간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들을 밀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 중 길 위에서는 굳이 붙잡지 않아도 된다. 처리하지 않아도 되고,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두면 된다. 길이 대신 흘러가주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쌓이면, 마음속에도 길 하나가 생긴다. 목적 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통로. 그래서 여행 중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은 종종 사소한 깨달음이나, 이유 없는 정리를 남긴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 제자리를 찾는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문득 떠오르는 건 화려한 장면이 아니다. 캐리어를 끌고 걷던 길, 환승 통로의 냄새, 밤늦게 도착한 버스 안의 조용함 같은 것들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시간인데, 이상하게 선명하다.
길 위에서의 시간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남는다. 누구와 있었는지, 무엇을 봤는지보다, 그때의 상태가 기억된다. 피곤했는지, 가벼웠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그래서 이 기억들은 사진보다 오래 남는다.
여행의 목적지는 돌아오면 과거가 되지만, 길 위에서의 시간은 감정으로 남는다. 다시 떠올리면, 그때의 공기와 속도가 함께 돌아온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는 흐릿해도, 그 길 위에 있던 나는 또렷하다.
여행 중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은 지도에도, 일정표에도 크게 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모여 여행의 온도를 만든다. 도착보다 덜 중요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순간들이다.
다음 여행에서는 도착한 곳만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좋다. 길 위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시간, 아무 생각 없이 걷던 구간, 창밖만 바라보던 몇 분을 떠올려도 충분하다. 여행은 결국 어디에 있었느냐보다, 어떤 상태로 이동했느냐로 오래 남는다.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은 그렇게, 조용히 여행의 중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