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시간 감각이 사라졌던 경험
여행지에서는 시계를 덜 보게 된다. 처음에는 일정 때문이고, 나중에는 굳이 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몇 시인지가 중요하지 않아지고, 지금이 오전인지 오후인지도 흐릿해진다.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는 건, 단순히 바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느슨해졌다는 신호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던 순간
여행 초반에는 여전히 시간을 의식한다. 체크인 시간, 이동 시간, 예약해 둔 일정들. 손목이나 휴대폰을 자주 확인하며 하루를 관리한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도 불안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그날은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숙소 근처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오래 앉아 있었고, 배가 고파지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다시 쉬었다. 시계를 보지 않았는데도 하루가 흘러갔다. 놀랍게도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시간 감각이 사라진 게 아니라, 시간을 붙잡고 있던 내가 풀렸다는 걸. 몇 시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자, 하루는 길어졌고 마음은 가벼워졌다.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시간
시간 감각이 사라질 때, 생각의 방향도 달라진다. 다음 일정이나 돌아간 뒤의 일을 떠올리지 않는다. 대신 지금 보고 있는 것, 지금 느끼는 것에 머문다. 햇빛의 온도, 바람의 속도, 길 위의 소리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감각 안으로 들어온다.
이 상태에서는 시간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는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하루를 산 것 같은 밀도가 생긴다. 반대로 평소의 일상에서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는 건, 지금이라는 순간이 충분히 채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이 경험은 특히 선명하다. 익숙한 역할도, 반복되는 루틴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상태. 시간을 쓰지 않고, 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 그때의 나는 시계가 아니라 몸과 감정으로 하루를 인식하고 있었다.
돌아와서야 알게 된 그 시간의 의미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시간은 빽빽해진다. 알람이 울리고, 일정이 시작되고, 하루는 다시 단위로 쪼개진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시간 감각이 사라졌던 그 경험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바쁜 날 중간에 문득 그 감각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 시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오히려 시간에 잡히지 않았던 상태. 그 기억은 지금의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 아니라, “이렇게도 살 수 있었지”라는 가능성의 흔적이다.
그 경험 덕분에 가끔은 시계를 내려놓는다. 일부러 약속을 비우거나, 목적 없는 산책을 하거나,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커피를 마신다. 여행지에서 배운 시간 감각은, 그렇게 일상 속으로 아주 조금 스며든다.
여행지에서 시간 감각이 사라졌던 경험은, 시간이 멈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의미다. 관리해야 할 대상에서, 함께 흘러가는 배경으로 바뀐 순간.
우리는 평소 시간을 너무 정확하게 쓰느라, 시간을 느낄 틈을 잃고 산다. 여행은 그 감각을 잠시 되돌려준다. 몇 시인지 몰라도 괜찮았던 하루, 지금이라는 순간만으로 충분했던 상태.
여행이 끝난 뒤에도, 그 시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필요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감각으로 남는다. 시간에 쫓기고 있다고 느껴질 때, 한 번쯤 그 여행지의 하루를 떠올려도 좋다.
그때의 나는 분명, 시간을 잃지 않고 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