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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나의 단점을 더 또렷이 본 이야기

by 딱지쓰 2026. 2. 11.

여행지에서 나의 단점을 더 또렷이 본 이야기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은근히 기대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면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덜 예민하고, 더 여유롭고, 지금보다 나은 모습의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남은 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깨달음이었다. 여행지에서 나는 장점을 발견하기보다, 오히려 나의 단점을 더 또렷이 보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나의 단점을 더 또렷이 본 이야기
여행지에서 나의 단점을 더 또렷이 본 이야기

낯선 환경은 단점을 숨겨주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단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익숙한 동선, 반복되는 관계, 예측 가능한 하루 속에서는 단점도 요령이 된다. 급한 성격은 ‘일 처리 빠름’으로 포장되고, 예민함은 ‘섬세함’으로 불린다. 하지만 여행지는 그런 완충 장치가 없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계획이 어긋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계속 생긴다. 그때 나는 생각보다 쉽게 짜증을 냈고, 작은 변수에도 마음이 흐트러졌다. 숙소 체크인이 늦어졌을 때,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메뉴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여유로운 여행자가 아니라, 통제력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침착하다고 믿어왔던 건, 사실 통제 가능한 환경에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걸. 여행지는 그 착각을 아주 빠르게 벗겨냈다.

혼자 있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나의 모습


여행 중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대화로 넘길 수도 없고, 역할로 가릴 수도 없는 상태. 그때 나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 엄격함이 얼마나 쉽게 나를 지치게 하는지 보게 되었다.
계획한 대로 하루가 흘러가지 않으면 괜히 스스로를 탓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됐는데’, ‘왜 이걸 미리 알아보지 않았지’ 같은 생각들이 계속 떠올랐다. 여행지에서도 나는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잘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혼자라서 외로웠다기보다, 혼자라서 나를 속일 수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웃어넘겼을 상황에서도, 혼자일 때는 내 반응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왔다. 그건 불편했지만, 동시에 아주 정직한 시간이었다.

단점을 본다는 건, 나를 덜 미워하게 되는 과정


여행지에서 나의 단점을 봤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진 건 아니다. 오히려 조금은 실망했고,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점들을 인정하고 나니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인정은 포기와 달랐다. 그건 기대치를 조정하는 일이었다. 완벽하게 여유롭지 않아도 되고, 매 순간 잘 대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 단점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 단점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이 생겼다.
여행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대신 나를 더 정확히 보게 해줬다. 그리고 그 정확함은, 생각보다 큰 위로였다.
여행지에서 나의 단점을 더 또렷이 본 경험은, 돌아와서도 오래 남았다. 일상에서도 예전처럼 완벽하려 애쓰다가 문득 그 여행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길을 헤매며 짜증을 냈던 나, 계획이 어긋나자 불안해하던 나. 그 모습이 부끄럽기보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된다.
어쩌면 여행의 진짜 역할은, 새로운 나를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나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점보다 단점이 더 선명해지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과 조금 더 솔직해진다.
그리고 그 솔직함이야말로, 여행이 끝난 뒤에도 계속 남는 가장 현실적인 기념품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