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여기에 살 수도 있겠다’고 느낀 찰나
여행지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칠 때가 있다.
“여기에 살 수도 있겠다.”
이 말은 이사를 결심하겠다는 선언도 아니고, 현실적인 계획도 아니다. 그저 아주 짧은 순간, 이 도시의 삶이 내 몸에 무리 없이 겹쳐지는 느낌이다. 관광객으로서의 흥분도, 떠날 사람의 아쉬움도 아닌,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감각. 그 찰나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너무 평범한 장면에서
‘여기에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절대 유명한 장소에서 오지 않았다. 전망 좋은 언덕도, 엽서 같은 풍경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침에 쓰레기를 내놓는 사람을 보았을 때, 동네 빵집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출근길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에는 감탄도 없고, 사진을 찍고 싶은 욕구도 없다. 대신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곳의 하루가 특별하지 않아 보여서, 오히려 좋다고 느껴진다. 매일 반복될 것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여행자의 시선은 잠시 사라지고 생활자의 시선이 고개를 든다.
관광객일 때는 ‘볼 것’을 찾지만, 그 순간의 나는 ‘살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어디에서 장을 볼지, 비 오는 날엔 어떤 길로 걸을지 같은 아주 사소한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질문들이 무리 없이 이어질 때, ‘여기에 살 수도 있겠다’는 감각이 생겼다.
그 도시는 나를 설명하지 않게 했다
그 찰나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 도시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멋진 사람이 되라고도, 특별한 하루를 만들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 도시의 리듬에 맞춰 걷기만 하면 될 것 같은 느낌.
여행지에서는 종종 스스로를 연출하게 된다. 잘 즐기고 있는지, 충분히 보고 있는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그런데 ‘여기에 살 수도 있겠다’고 느낀 순간에는 그런 연출이 필요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어떤 사람처럼 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 도시는 조용히 말했다.
“그냥 네 속도로 살아도 돼.”
그 말은 소음이 적어서도, 사람이 친절해서도 아니었다. 공간의 밀도, 걷는 사람들의 표정, 하루의 속도가 나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바꾸지 않아도 받아들여질 것 같은 장소에서만, 그런 생각이 든다.
살고 싶다는 감각은 ‘도망’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건, 그 생각이 현재의 삶이 싫어서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떠나고 싶다는 절박함도, 지금을 부정하는 마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그대로 가져와도 괜찮겠다는 안도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 찰나는 오래 붙잡히지 않았다. 며칠 뒤면 떠날 걸 알고 있었고, 실제로 살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돌아와서도 가끔, 일상 속에서 그 도시의 공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건 이사를 가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이런 상태로 살아도 괜찮다’는 기억이었다. 더 잘 살지 않아도, 더 멀리 가지 않아도, 지금의 나로도 숨 쉬기 편했던 순간. 여행은 그 가능성을 잠깐 보여주고, 조용히 물러났다.
여행 중 ‘여기에 살 수도 있겠다’고 느낀 찰나는, 실제로 그곳에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내가 어떤 환경에서 덜 긴장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다. 어떤 속도, 어떤 소음, 어떤 밀도에서 마음이 편해지는지.
그 찰나는 금방 지나가지만, 기준은 남는다. 이후의 여행에서도, 일상에서도, 나는 비슷한 감각을 찾게 된다. 무리 없이 숨 쉬어지는 공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여행이 끝난 뒤에도 남는 건 장소가 아니라 그때의 나다.
‘여기에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로 살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