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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없이 걷다가 도착한 장소들만으로 만든 여행기

딱지쓰 2026. 1. 4. 14:55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주 무모한 선택을 했다. 지도를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얼마나 걸어야 할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걷기로 했다. 여행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보통 불안한 일로 여겨지지만, 이번에는 그 불안을 일부러 초대해 보고 싶었다.

 

지도 없이 걷다가 도착한 장소들만으로 만든 여행기
지도 없이 걷다가 도착한 장소들만으로 만든 여행기

길을 잃겠다는 선택이 여행을 시작하게 했다

숙소를 나서며 휴대폰의 지도 앱을 껐다. 화면이 꺼지자 동시에 마음이 조금 허전해졌다. 이제부터는 이 도시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큰 길을 따라 걸었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소음. 하지만 곧 골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별다른 이유 없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도 없이 걷는다는 건 방향 감각을 믿는 일이 아니라, 우연을 믿는 일에 가까웠다. ‘이쪽으로 가면 뭐가 나올까’라는 기대보다 ‘아무것도 안 나와도 괜찮다’는 마음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몇 번의 선택이 쌓이자, 어느새 내가 처음 있던 장소는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길을 잃었다는 감각은 불안보다는 묘한 해방감을 줬다. 돌아갈 길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정에 맞춰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이 여행은 도착지가 아니라 걷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우연히 도착한 장소들이 만들어준 이야기

한참을 걷다 보니 작은 광장에 도착했다. 관광객은 거의 없었고,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현지인들만 보였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냥 하늘을 보고 있었다. 계획했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장소였다.

그곳에서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풍경도, 유명한 건물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아마도 이 장소가 ‘목적지’가 아니라 ‘결과’였기 때문일 것이다. 걷다가 도착했기에, 기대도 실망도 없었다. 그저 도착했을 뿐이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또 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빨래가 널린 창문, 오래된 간판, 느리게 지나가는 자전거. 이 도시의 진짜 얼굴은 지도 위의 점이 아니라, 이렇게 우연히 만난 장면들 속에 있었다. 나는 이 여행에서 장소를 선택하지 않았고, 대신 장소가 나를 선택했다.

지도 없이 도착한 장소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설명하기 어렵고, 추천하기도 애매했지만, 분명히 기억에 남을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풍경이 아니라, 그 장소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었다.

돌아갈 길조차 모르던 순간에 알게 된 것들

해가 기울 무렵,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처음이라면 당황했을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차분했다. 길을 찾는 게 급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건, 길을 안다는 것이 꼭 안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길을 모를 때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었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도가 없으니 고개를 들게 되었고, 방향을 묻기 위해 사람을 보게 되었고,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결국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익숙한 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다시 지도가 있는 세계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남은 것은 명확한 동선도, 추천 리스트도 아니다. 대신 지도 없이 걸으며 도착한 장소들의 감각이 남았다. 우연, 선택, 망설임, 그리고 계속 걷는 용기. 이 여행기는 그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 여행에서도 다시 지도를 끌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한 번은, 길을 잃겠다는 선택이 얼마나 풍부한 여행을 만들어주는지 알게 되었다. 목적지가 없는 여행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많은 것들로 채워진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