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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길 위의 소리만 기록한 글

by 딱지쓰 2026. 2. 15.

여행지에서 길 위의 소리만 기록한 글


여행을 하면 보통 눈이 먼저 바빠진다.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화면을 확인한다. 하지만 어느 날의 여행에서는 이상하게도, 보고 싶은 마음보다 듣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그날 하루를, 풍경 대신 길 위의 소리만 기록하기로 했다. 보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보다, 들으면 더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여행지에서 길 위의 소리만 기록한 글
여행지에서 길 위의 소리만 기록한 글

소리는 붙잡을 수 없어서 더 진짜 같았다


여행지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눈보다 귀를 열었다. 돌길 위를 밟을 때 나는 소리, 멀리서 섞여 오는 말들, 어디선가 닫히는 문 소리. 소리는 늘 먼저 도착하고,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진은 프레임을 고르게 하지만, 소리는 선택할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동시에 쏟아진다. 그 무질서함이 오히려 그 도시의 실제에 가까워 보였다. 관광지의 대표적인 장면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소리들이 그곳의 하루를 더 정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메모장에 이렇게 적기 시작했다.
‘카페 잔이 부딪히는 소리’, ‘자전거가 지나갈 때 바람이 먼저 남긴 소리’, ‘신호가 바뀌기 직전의 짧은 정적’.
문장이 아니라 단어에 가까운 기록. 그날의 도시는 그렇게 소리 조각으로 남았다.

 

소리만 남기자, 감정이 먼저 기록되었다


신기하게도 소리만 적기 시작하자, 감정이 더 또렷해졌다. 풍경을 설명할 때는 늘 ‘어땠는지’를 생각해야 했지만, 소리를 적을 때는 ‘느껴졌는지’만 남았다. 밝았는지, 거칠었는지, 느렸는지, 갑작스러웠는지.
같은 길인데도 소리에 따라 기분이 달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많아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고, 멀어질수록 숨이 느려졌다. 그날의 나는 도시를 분석하지 않고, 도시의 리듬에 반응하고 있었다.
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보기에는 평온해 보였던 거리도, 소리로는 늘 바빴고, 화려해 보이던 광장도 어느 순간엔 텅 빈 울림만 남았다. 나는 그 소리들 사이에서, 내가 편해지는 순간과 불편해지는 순간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소리로 기록한 하루는 돌아와서도 살아 있었다


여행이 끝난 뒤, 사진을 다시 볼 때보다 소리 기록을 다시 읽을 때 더 많은 것이 돌아왔다. 장소의 이름은 흐릿했지만, 그때의 상태는 분명했다. 어떤 소리 앞에서 멈췄고, 어떤 소리를 지나쳤는지.
‘아침에 빗자루 쓸리는 소리’,
‘낮은 톤으로 흘러나오던 라디오’,
‘밤에 갑자기 끊긴 대화의 잔향’.
이 기록들을 읽으면, 그날의 공기가 다시 느껴졌다. 소리는 시각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을 데려왔다. 풍경은 변해도, 그 소리가 만들어낸 감정의 결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행에서 모든 걸 남기려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하나만 정확히 남기고 싶어졌다. 소리는 그 역할에 충분했다. 소리는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길 위의 소리만 기록한 하루는, 이상하게도 가장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놓친 것도 분명 있지만, 듣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감각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도시는 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는 소리로 숨 쉬고,
사람은 그 소리 속에서 자기 속도를 찾는다.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아마 또 귀를 먼저 열게 될 것이다.
사진보다 사라지기 쉬운 것들,
하지만 사라진 뒤에도 오래 남는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