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계획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여행을 준비할 때 나는 늘 계획부터 세웠다. 어느 날 어디를 갈지, 몇 시에 이동할지, 무엇을 먹을지. 계획은 여행을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장치 같았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지도이자,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한 보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계획이 완벽하게 무너진 날에서 시작되었다.

계획이 무너졌다는 건,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는 뜻
그날의 계획은 단순했다. 오전에 이동하고, 유명한 장소를 하나 보고, 오후에는 예약해 둔 식당에 가는 일정. 그런데 아침부터 모든 게 어긋났다. 교통편이 지연됐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줄이 길었고, 결국 예약한 시간도 놓쳤다.
처음에는 당황보다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올라왔다.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 왜 이렇게 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계획이 무너졌다는 사실보다, 계획에 의지하고 있던 내가 무너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여행을 즐기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계획을 붙잡고 있었다는 걸. 계획이 사라지자, 나는 갑자기 아무 기준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 그 공백이 처음에는 몹시 불편했다.
더 이상 망칠 수 없을 때, 움직임이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계획이 완전히 망가진 뒤에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미 어긋난 일정, 이미 실패한 하루. 더 이상 잘 해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때부터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도 앱을 끄고, 눈에 들어오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발걸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골목에서 멈추게 되고, 시간 계산 없이 카페에 앉게 되었다.
그날 처음으로 ‘어디를 가야 하지?’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뭐가 느껴지지?’를 기준으로 움직였다. 계획이 있을 때는 계속 다음을 향해 있었는데, 계획이 사라지자 지금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줄 알았던 하루는, 그때부터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계획이 없을 때 드러난, 나의 진짜 여행 방식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여행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유명한 장소를 몇 개 놓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에 남은 건, 아무도 추천하지 않았던 작은 식당, 우연히 앉아 있던 벤치에서 보낸 시간, 길을 헤매다 만난 풍경들이었다.
계획이 있었을 때의 나는 ‘잘 여행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많이 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후회 없는 하루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계획이 무너진 뒤의 나는 그냥 ‘그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잘하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에게 여행은 완성도가 아니라, 상태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걸. 준비한 대로 흘러갈 때보다, 준비하지 않은 순간에 더 나다운 반응이 나왔다. 계획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시작된 건, 장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이해였다.
여행 중 계획이 무너졌을 때, 나는 처음엔 그날을 실패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하루가 여행의 중심으로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게 정리된 순간보다, 모든 게 풀려버린 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계획은 여행을 돕지만, 때로는 여행을 가린다. 계획이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하지만, 계획이 없을 때 우리는 솔직해진다. 그래서 지금은 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준비한 일정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걸.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여전히 계획을 세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 계획이 무너진다면,
그때를 조금은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