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이번만큼은 관광지를 최소화하자고 마음먹었다. 유명한 거리도, 인증샷이 남는 장소도 굳이 찾아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가 선택한 곳은 의외로 단순했다. 현지 슈퍼마켓. 그 나라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공간, 가장 사적인 소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통해 그 나라를 이해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예상보다 훨씬 솔직한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관광지는 말해주지 않는 일상의 풍경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나는 숙소 근처의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화려한 간판도 없고, 관광객을 배려한 설명도 없는 공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내가 알고 있던 ‘여행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걸 느꼈다.
진열대에는 화려한 기념품 대신, 대용량 생수와 저렴한 즉석식품들이 눈에 띄었다. 관광지에서는 보기 힘든 브랜드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포장 디자인도 실용적이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어떤 것을 매일 먹고, 어떤 가격대에서 고민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장바구니 속 풍경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 퇴근 후 들른 듯한 직장인, 천천히 진열대를 둘러보는 노인까지. 그들이 담는 물건은 이 나라의 식습관과 생활 패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관광지는 나라가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라면, 슈퍼마켓은 숨길 수 없는 일상의 얼굴이었다.
진열대 사이에서 읽은 사회의 온도
며칠 동안 다른 동네의 슈퍼마켓들을 찾아다니며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같은 나라라도 동네에 따라 상품 구성과 가격대가 미묘하게 달랐다. 어떤 지역은 신선 식품이 풍부했고, 어떤 곳은 냉동식품과 즉석식품이 주를 이뤘다. 그 차이는 이 도시 안에서도 삶의 형태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물가였다. 관광지에서는 체감하기 어려웠던 현실적인 가격들이 슈퍼마켓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나라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 어떤 품목이 부담이 되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의 기준으로 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건 친환경 제품과 대체 식품의 비중이었다. 종이 포장, 리필 상품, 식물성 대체 식품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진열되어 있는지를 보며 이 사회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여행 책자에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마주한 나라의 진짜 얼굴
슈퍼마켓에서 가장 많은 생각이 들었던 순간은 계산대 앞이었다. 긴 줄을 서며 사람들의 표정과 대화를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인사, 계산을 기다리는 태도, 직원과 손님 사이의 거리감까지. 그 작은 장면들 속에서 이 사회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떤 곳에서는 계산원이 아주 담담했고, 어떤 곳에서는 짧은 농담이 오갔다. 팁 문화가 있는지 없는지, 포장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봉투 하나에도 돈을 받는지 아닌지. 이런 사소한 차이들이 모여 그 나라의 생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행을 마칠 즈음, 나는 깨달았다. 이 여행에서 내가 가장 많이 방문한 장소는 명소가 아니라 슈퍼마켓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곳에서 본 풍경들이야말로 이 나라를 가장 오래 기억하게 만들 것 같았다.
이 나라의 민낯은 화려하지 않았다. 때로는 투박했고, 때로는 계산적이었고, 때로는 놀라울 만큼 실용적이었다. 하지만 그 솔직함이 좋았다. 슈퍼마켓은 이 나라가 여행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가장 먼저 슈퍼마켓을 찾게 될 것 같다. 그곳에서라면, 그 나라의 진짜 이야기를 가장 조용하게 들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