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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만난 ‘침묵의 순간’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늘 무언가를 기대한다. 새로운 풍경, 새로운 말, 새로운 설명들. 여행은 보통 소음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의 언어, 거리의 음악, 사진을 찍으며 나누는 감탄.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을 돌아보면,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의 순간들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설명도 필요 없었던 시간들. 그 조용함 속에서 여행은 비로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풍경이 남았다여행 초반, 나는 늘 하던 대로 움직였다. 풍경을 보면 설명하고 싶어졌고, 감정을 느끼면 말로 붙잡고 싶었다. 혼자 여행 중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 문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어떤 곳이고’, ‘이 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침묵은 어색했고, 무언가는 기록되어야..

관광 명소를 단 한 곳도 가지 않은 여행기

이번 여행에서 나는 하나의 규칙을 정했다.관광 명소는 단 한 곳도 가지 않는다.지도에 별표로 표시된 장소들, 여행 책자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곳들, 모두 제외하기로 했다.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는 대신, 어디를 가지 않을지를 먼저 정한 여행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결정 하나로 여행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안 가는 선택’이 만들어낸 낯선 자유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보통은 공항이나 역을 나서자마자 어디로 갈지 명확하다. 유명한 거리, 대표적인 건축물, 꼭 봐야 할 풍경들이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가야 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처음 며칠은 괜히 주변을 맴돌았다. 관광 명소로 이어질 것 같은 방향은 본능적으로 피했..

비 오는 날만 골라 다닌 여행의 의미

여행 일정을 짜면서 나는 일부러 날씨 예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가장 비가 많이 오는 날들을 골라 이동 날짜를 정했다. 맑은 날의 풍경은 이미 충분히 보아왔고, 햇빛 아래의 도시는 어디든 비슷하게 아름다웠다. 이번에는 달라지고 싶었다.비 오는 날에만 걷는 여행, 그것이 이번 여행의 조건이었다. 비를 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달라진 여행여행에서 비는 대개 실패로 취급된다. 계획은 흐트러지고, 사진은 망가지고,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 전제를 아예 버리기로 했다. 우산을 챙기되, 비를 피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비 오는 날의 도시는 처음부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리는 낮아지고, 색은 진해졌다.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고, 머무는 장소는 자연스럽게 실내로..